대표전화

070-4384-7849

010-5465-7745

일반자료실

분별있는 사랑으로 아이의 공부를 돕다

  • 날짜
    2013-03-12 08:34:19
  • 조회수
    1173
박민근의 심리치료] 분별 있는 사랑으로 아이의 공부를 돕다
조선일보 | 맛있는교육
2013.03.05 14:22

아이의 공부를 걱정하는 부모들이 많다. 그런데 아이가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닌, 스스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여러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도움을 주어야 한다. 여기저기서 자기주도학습법을 외치지만 사실 자기주도학습이란 방법이 아니라 마음이다. 아이의 의욕이 먼저이다. 아이가 ‘신독(愼獨)’할 수 있도록 강한 정신력을 심어주는 것이다.

자기주도학습은 다양한 요인들이 교차하며 만드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특히 공부를 하고자하는 학구열과 의욕이 가장 중요하다. 원래 아이에게는 강한 지적 욕구가 존재하고, 그 지적 욕구를 실현하려는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 과잉학습과 무차별 선행학습은 아이의 타고난 호기심과 학구열을 죽인다.

나는 아이들이 본성적으로 강한 정신력과 선한 의지를 가졌다고 믿는다. 학습에 대한 동기부여를 형성하는 꿈과 비전 역시 아이 본연의 위대한 정신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런데 아이의 위대한 정신력의 바탕에는 보다 근본적인 마음과 ‘마음도움’이 존재한다. 바로 자기 주변의 의미 있는 타인들이 보내는 정서적인 지지와 사랑이다. 어쩌면 이것이 아이를 긍정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에너지인지도 모르겠다. 애착에 관한 이론은 부모에게 여러 함의를 던진다.

태어나고 상당 기간 아이는 주변의 양육자들과 밀접한 협력체계와 상호작용을 유지한다. 그리고 이때 형성되는 유대를 ‘애착’이라고 부른다. 존 보울비는 애착 형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아이들은 정서적 능력이 훼손되고 생의 대한 의지를 상실한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애착 대상, 주로 엄마와 정서적 관계를 강하게 맺는데 이 정서적 유대가 긴밀하면 할수록 아이의 생의 활력은 강해지고 풍부해진다. 애착에 대한 최신의 연구는 아동의 애착 형성 기간이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는 길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생애 초기 1-2년 정도의 애착이면 충분하다는 주장은 더 이상 합당하지 않다. 길게는 5년 이상을 거론하는 학자도 있다.

얼마 전 미국에서 인기를 끈 ‘애착육아’ 주창자들은 7년을 이야기한다. 아시아 여러 민족처럼 7-8년 이상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대표 사례 국가가 한국이다. 애착 실패는 의욕이 부족한 아이를 만드는 인과율로 여겨진다. 애착 형성이 잘 이루어진 아동은 자기주도성이 뛰어나며, 학업성취 면에서도 남다른 성과를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애착 형성에 있어서는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 보울비가 관찰했던-주변에 양육자이 버젓이 있었으나- 고아원에서 많은 아이들이 애착이 형성되지 못해 죽음에 이르렀던 것도, 이스라엘 키부츠의 공동육아 환경에서 인성발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아동이 속출했던 것도, 양육자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제대로 질적 애착이 형성되었는가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애착 형성에 관한 이야기는 아이들의 장기적인 정서발달에 대해 많은 시사를 한다. 정훈이의 부모는 국내 유명 연구소의 연구원이었다. 아빠도 바빴지만, 엄마도 무척 바쁜 사람이었다. 아빠, 엄마의 귀가시간은 8시를 넘기기가 일쑤였다. 아이는 유모와 도우미 아주머니 손에서 자랐다. 아주머니는 빈번하게 교체되었고, 집에 온 아빠, 엄마는 양육 대부분을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일임했다.

아이가 한두 살 때 도우미 아주머니는 피곤한 나머지 울고 떼쓰는 정훈이를 강제로 재우는데 급급했고, 부모들은 아이가 울고 떼를 써도 그러려니 하며 내버려두었다. 아이는 이내 잠잠해졌고, 그 후 몇 년 동안 정훈이는 말 잘 듣고 순한 아이로 자랐다.

지금 초등학교 2학년이 된 정훈이는 아무런 의욕이 없는 아이였다. 정훈이가 반응하는 대상은 오랫동안 자신을 지켜주던 집안의 사물들이었다. 장난감, 레고, 인형들에 대한 애착과 의존도가 무척 높아서, 장난감이 한 개라도 사라지면 견딜 수 없어했다. 그리고 애착에 문제가 있는 대부분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불안해했고, 우울했고, 타인과 제대로 된 정서작용을 하기 힘들어한다.

나는 부모와 상담하며 이렇게 위로했다.

“이스라엘 키부츠에서 아이를 키울 때 중요한 지침이 있었대요. 물론 대단히 잘못된 지침이었죠. 아이의 자립심과 의욕을 키워주기 위해 울고 떼쓰는 아이를 모른 척하라는 것이었답니다. 당연히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그 애착 형성이 이루어지지 않았겠죠.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보다 지능이 떨어졌고, 정서적 능력 또한 심각하게 훼손되었습니다. 분명 초기의 애착 실패는 아이의 인생과 인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5살까지 애착이 잘 형성된 아이가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때부터 부모들이 불화하여, 매일 싸움을 반복하고 아이를 억압하고 비난한다면 아이는 과연 어떻게 자랄까요? 한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서 성인이 되기까지는 족히 20년이 걸립니다. 물론 저는 15살 전후까지 정도만 잘 키우면 된다고 말씀드릴 때가 많지만, 어쨌든 그 긴 시간 동안 아이는 정서적으로 세심하게 보호받아야 합니다. 5살 된 아이들도 사랑을 바라지만, 15살, 아니 18, 20살이 된 아이들도 부모의 사랑을 바랍니다. 부모 사랑의 종착점이란 없는 것이지요.”

실의와 낙담에 빠진 정훈이 부모에게 나는 지금부터 잘하면 된다는 희망을 주었다.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한없는 사랑을 주라고 했다. 그런데 이 한없는 사랑은 무분별한 사랑은 아니다.

나는 ‘분별 있는 사랑’이란 표현을 잘 쓴다. 부모가 자식의 지덕체 성장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가지고 아이를 분별력 있게 사랑해야 한다. 5살이 넘어 지성이 발달하고 있는 아이라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는 지혜로운 사랑법이다.

사랑은 과잉보호가 아니고, 물질적인 충족도 아니다. 사랑은 지나친 허용이 아니고, 상대방이 무조건 어려움을 벗어나게 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비유가 적절할 듯싶다.

아이가 망망대해를 혼자 조타를 잡고 항해해나갈 때-절대 대신 조타를 해주어서는 안 된다-, 가끔 더위를 식혀주는 바람이고, 어두운 밤바다를 헤쳐 나가게 돕는 북두칠성이고, 때로 등을 두드리는 동료이며, 매일 먹을 고기를 낚시 하는 법을 가르치는 인자한 스승이다.

부모가 분별력과 지혜를 잃어서는 안 된다. 퇴계 이황은 자식 사랑이 남달랐다. 자손들에게 무려 1300통이나 되는 편지를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물론 퇴계의 자식 사랑은 지금의 우리 세태와는 달랐다.

“너희들은 내가 없다고 학업을 게을리 하거나 그만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혼신을 다해 분발하여 부지런히 공부하고 뜻을 이루는 것에 밤낮 최선을 다해야 한다. 뜻이 있는 선비들을 보거라. 어찌 부모 형제가 옆에서 지켜보고 꾸짖은 후에 공부를 하겠느냐?”

퇴계는 이미 장성해 결혼까지 한 자녀에게조차도 이렇게 학습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유학자들에게 학문은 입신양명의 수단이 아니다. 전해지는 그의 편지에는 자식에게 시험을 치도록 당부하는 글이 많다. 하지만 이 역시 입신양명을 하라는 뜻보다는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라는 숨은 큰 뜻이 있다.

유학자들에게 학문은 죽을 때까지 갈고 닦는 인격의 수양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마흔이 가까워지는 아들에게조차 그는 지은 시의 잘못된 부분을 알려주며 늘 학문에 게으름이 없기를 당부했다.

지금의 현실에 과한 이야기일 수는 있으나, 적어도 어린 자녀를 기를 때 아이에게 세상에 대한 정의로움과 분별심을 갖추도록 돕는 일은 퇴계의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퇴계의 자녀사랑이 학문에만 집중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께 너의 편지를 보고서 너의 병세가 의심스럽다는 것을 알았다. 염려스럽고 또 염려스럽구나! 어제는 어땠는지 모르겠구나. 대개 너는 몸이 본래 약한데 (이곳에 와서) 얼마 전 추운 데서 잠을 잔 것이 마음이 걸렸다. 아마도 그 때문에 병을 앓는 것이 아닌가 싶다. 또 이곳으로 온다고 하는데 여기는 네가 꼭 필요한 일이 없단다. (그러니 오지 말거라)”

이 역시 이미 장성해 자식까지 둔 자식에게 보는 편지이다. 편지에는 아픈 자식에 대한 지극한 마음이 듬뿍 담겨있다. 분별 있는 사랑, 자애(慈愛)라는 것은 자녀를 단순한 보호대상이나 혈연의 관점에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과 관계 맺고 있는 자녀가 세상에서 중심으로 바르게 설 수 있도록 끊임없이 관심 갖고 이끌어주는 것이 바로 자애이다.

역시 같은 부모 입장인 나 역시 항상 이 분별심 있는 자애를 어떻게 자녀에게 전할까 늘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헬로스마일 소아청소년 심리센터 원장 / 퇴계문학치유연구소 소장